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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저는 그날을 잊지 못합니다. 담배 수확이 막 끝난 시골 마을, 온 가족이 지쳐 있던 저녁이었습니다. 라디오에서 긴급 뉴스가 흘러나왔고, 어머니는 밥상 앞에서 수저를 멈추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열네 살이던 저는 세상이 왜 갑자기 그렇게 조용해지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침묵의 의미를 〈남산의 부장들〉을 보고 나서야 조금 더 깊이 알게 됐습니다.
흔들린 충성이 만들어낸 두 얼굴의 인간
이 영화의 심장은 이병헌입니다.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실제 인물 김재규를 모티브로 한 가상 인물)을 연기하는 그의 눈빛은 단 한 장면도 단순하지 않습니다. 대통령 앞에서 그의 눈은 낮아집니다. 자세가 작아지고, 말 끝이 흐려지고, 웃음의 타이밍이 0.5초씩 늦습니다. 그런데 부하 앞에 서면 그 눈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습니다. 한 인물 안에 두 개의 얼굴이 공존한다는 것을 이병헌은 대사가 아니라 몸으로 보여줍니다.
저는 그 눈빛을 보면서 1984년 대기업에 막 입사했던 제 자신을 떠올렸습니다. 생산관리 현장에서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시에 "왜?"라는 질문 자체가 불충(不忠)으로 여겨지던 시대를 저도 몸으로 겪었습니다. 숫자가 맞지 않아도, 현장이 달라도 "예, 알겠습니다"를 반복해야 했던 날들.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의 공장에서 본사 목표치를 맞추려 밤을 새우다가 문득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이러고 있나' 싶었던 순간들이 김규평의 얼굴 위에 겹쳐 보였습니다.
예전에 저는 그런 복종을 '조직 생활의 당연한 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다르게 보입니다. 충성과 공포는 겉모습이 너무 닮아 있어서, 당사자조차 자신이 무엇에 복종하는지 모를 때가 있다는 것. 김규평이 대통령과의 술자리에서 짓는 어색한 미소, 팽팽하게 당겨진 턱 근육의 긴장감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이병헌은 그 경계선을 과장 없이, 그러나 치밀하게 해냈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지금 조직 안에서 '충성'과 '공포' 중 어느 쪽으로 움직이고 계십니까?
이성민이 연기한 대통령은 더 복잡한 층위를 가집니다. 단순한 악인이 아닙니다. 권력의 정점에 선 노인의 고독, 아무도 자신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구조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의 비극을 이성민은 눈가의 주름과 술잔을 쥔 손 떨림 하나로 담아냅니다. 곽도원은 박용각 역을 맡아 권력에서 밀려난 인물의 두려움과 욕망을 절제된 연기로 표현합니다. 미국 청문회 장면은 영화의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중요한 축입니다. 대통령은 가해자인 동시에, 자신이 만든 시스템의 포로라는 아이러니(irony, 기대와 현실의 역설적 괴리)가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합니다.
밀실 권력의 민낯
우민호 감독은 이 영화를 '밀실의 영화'로 설계했습니다. 광화문 광장도, 시위 군중도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좁은 회의실, 어두운 복도, 비밀 연회장 안에서 벌어집니다. 카메라는 인물들 사이의 거리를 의도적으로 좁게 잡고, 숨 막히는 압박감을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미장센(mise-en-scène, 화면 구도와 공간 배치를 통한 연출 기법)을 구사합니다.
조명도 의도적입니다. 전체적으로 하드 라이팅(hard lighting, 직접 조명으로 그림자를 강하게 만드는 기법)을 피하고 앰비언트 라이팅(ambient lighting, 주변광으로 분위기를 연출하는 기법)을 주로 사용합니다. 인물들이 완전히 밝지도, 완전히 어둡지도 않은 중간 어딘가에 놓입니다. 이것은 이 영화가 선악을 명확히 가르지 않겠다는 감독의 선언입니다.
〈남산의 부장들〉은 2020년 개봉 당시 관객 수 475만 명을 기록하며 그해 초 한국 영화 흥행 1위에 올랐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링크) 코로나19 확산 직전 개봉된 시점임을 감안하면 더욱 의미 있는 수치입니다. 원작은 동아일보 기자 출신 김충식 작가가 집필한 동명의 논픽션으로, 중앙정보부(KCIA, Korea Central Intelligence Agency, 국가 최고 정보·수사기관)의 실체와 10·26 사건을 다룬 책입니다.(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링크)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충격적으로 본 것은 '악인의 부재'입니다. 단순한 악당이 한 명도 없습니다. 모두가 어떤 논리 안에서 움직이고, 모두가 자기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곽도원이 연기한 박용각이 미국 청문회에서 모든 것을 폭로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용기 있는 행동처럼 보이지만 클로즈업된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립니다. 용기와 공포가 동시에 존재하는 인간의 실체를 그 손 하나로 표현했습니다.
저도 10여 년 전 사기를 당하고 억울함을 세상에 소리치고 싶었지만, 입을 열면 제 무능함과 부끄러움이 함께 드러날 것 같아 그냥 삼켰습니다. 박용각은 그 부끄러움을 각오하고 마이크 앞에 섰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일이 얼마나 외롭고 무거운가를 이 장면은 아주 조용하게 보여줍니다. 이 영화가 단순한 역사 재연을 넘어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한 이유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알면서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지 않으십니까?
총성으로 끝난 40일, 그날의 기억과 지금의 시선
영화는 40일이라는 시간을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결말을 이미 알고 보는 역사 영화의 특성상, 서스펜스(suspense, 긴장감과 불안감을 고조시키는 극적 장치)는 '무슨 일이 벌어지나'가 아니라 '어떤 경위로 그날에 이르렀나'에서 나옵니다. 우민호 감독은 이것을 정확히 계산했습니다. 총성이 울리기 전까지 카메라는 단 한 번도 서두르지 않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 버스 핸들을 잡습니다. 시내버스 운전석은 작은 세계입니다. 출근길 직장인, 병원 가는 어르신, 교복 입은 학생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면 조직과 권력의 논리가 작은 규모로 반복된다는 것을 느낍니다. 누군가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 침묵하고, 누군가는 눈치를 보며 편을 선택합니다. 1979년 궁정동 안 가(安家, 대통령의 비공식 사적 공간)에서 벌어진 일과 규모만 다를 뿐, 인간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핸들을 돌릴 때마다 드는 요즘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영화가 밀실 정치에 집중하다 보니, 당시 거리에서 유신 철폐를 외치던 시민들의 목소리가 완전히 지워집니다. 역사는 권력자들만 만드는 것이 아닌데, 이 영화 안에서 민중(民衆)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관점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이 영화가 다루지 않은 영역을 관객 스스로 채워야 한다는 숙제를 남깁니다.
독자 여러분은 권력의 작동 방식을 직접 경험하신 적 있으십니까?
〈남산의 부장들〉은 역사 기록이 아니라 인간 탐구입니다. 충성과 공포, 신념과 계산, 권력과 고독이 어떻게 한 인간 안에서 뒤엉키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이병헌과 이성민의 연기는 교과서적 수준이며, 우민호 감독의 밀실 연출은 장르 영화의 문법을 뛰어넘습니다. 감독의 메시지: 우민호 감독은 10·26 사건 자체보다 권력 안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심리를 그리고자 했습니다. 누구를 영웅이나 악인으로 규정하기보다 권력이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다만 역사적 재현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니 감정의 카타르시스(catharsis, 예술 작품을 통한 감정의 정화와 해소)가 상대적으로 약하고, 밀실 밖 시민들의 시선이 완전히 부재한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추천 대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 현대사에 관심 있는 분
-정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좋아하는 분
-권력과 조직 심리를 깊이 생각해 보고 싶은 분
-이병헌·이성민의 명품 연기를 감상하고 싶은 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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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진흥위원회(KOFIC),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10·26 사건」
- IMDb, The Man Standing Next (2020)
- 다음 영화, 《남산의 부장들》
- 나무위키, 《남산의 부장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