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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여운것들] 벨라 의 선택은 , 욕망의 발견, 자유

by 어성초님 2026. 6. 14.

가여운것들

2004년 가을, 저는 처음 중국 땅을 밟았습니다. 20년 넘게 다닌 회사가 저를 낯선 곳으로 밀어 넣었을 때, 저는 언어도 문화도 모르는 채 매일 밤 혼자 밥을 먹었습니다. 그 기억 때문인지, 〈가여운 것들〉을 보는 내내 저는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벨라의 선택은 진정한 자율성인가

영화는 죽은 여성의 뇌에 태아의 뇌를 이식한 벨라 박스터(엠마 스톤)가 세상을 처음 배워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아이의 인지로 어른의 몸을 갖고 살아갑니다. 걷는 것도, 먹는 것도, 말하는 것도 서툴지만 거침이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갓윈 박스터(윌렘 대포)라는 보호자의 울타리를 스스로 걷어차고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던컨 웨더번(마크 러팔로)이라는 남자를 따라 유럽을 떠돌며 욕망과 지식과 고통을 몸으로 습득해 갑니다.

여기서 자율성(Autonomy)이란, 단순히 원하는 것을 하는 자유가 아니라 외부의 강요 없이 스스로 선택의 근거를 만들어가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벨라가 처음 자유를 얻었을 때, 그녀의 선택은 어디까지 자신의 것이었을까요? 그녀를 설계한 건 갓윈이고, 그녀를 탈출시킨 건 던컨의 유혹이었습니다.

저도 비슷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적이 있습니다. 중국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MRO 사업을 시작했을 때, 저는 그것이 온전히 제 선택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그 선택의 절반쯤은 회사 생활 20년이 만들어놓은 관성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주변의 기대였습니다. 벨라의 첫 번째 탈출이 진정한 자율성이 아니었듯, 내 첫 번째 독립도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란티모스 감독은 이 영화에서 미장센(Mise-en-scène)이라는 연출 기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합니다. 여기서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 요소 — 세트, 의상, 조명, 배우의 동선 — 를 감독이 의도적으로 설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장된 스팀펑크 세트와 어안렌즈로 왜곡된 화면은 벨라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얼마나 낯설고 불균형한 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합니다. 어안렌즈란 극단적으로 넓은 화각을 담는 렌즈로, 화면 가장자리가 휘어 보이는 특유의 왜곡 효과를 냅니다. 저는 그 왜곡된 화면을 보며 중국 첫해 숙소 창밖을 내다보던 느낌을 떠올렸습니다. 모든 것이 기울어져 보였던 그 시절 말입니다.

욕망의 발견은 해방인가 새 굴레인가

벨라가 세상을 알아가는 방식 중 가장 도발적인 장면들은 그녀의 성적 욕망에 관한 부분입니다. 그녀는 수치심 없이 욕망을 탐색하고, 그 욕망을 생존 수단으로도 자기 탐구의 도구로도 사용합니다. 많은 관객이 이 장면들을 불편해했고, 저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불편함의 정체를 생각해 보니, 그건 벨라 때문이 아니라 욕망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존재를 낯설어하는 제 안의 무언가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리비도(Libido)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리비도란 단순한 성적 에너지를 넘어, 삶을 추동하는 근원적 욕망 에너지 전체를 의미합니다. 사회복지사와 심리상담사 공부를 하면서 저는 이 개념이 얼마나 억압되는지를 배웠습니다. 상담 이론서 속 사례들이 전부 제 이야기처럼 읽혔던 건, 저도 오랫동안 제 욕망을 '감당 가능한 크기'로만 잘라서 허용해 왔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나라면 어땠을까요? 벨라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채 세상에 던져졌다면, 저는 그렇게 욕망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을까요. 사기를 당해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저는 솔직히 작아졌습니다. 쿠팡 알바를 하고, 배민 배달을 뛰고, 새벽에 버스 핸들을 잡으며 저는 욕망이라는 단어를 의식에서 지워버렸습니다. 그냥 버티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묻습니다. 욕망을 지워낸 자리에 남는 건 진짜 나인가, 아니면 그냥 기능하는 기계인가. 이 질문이 저한테는 꽤 오래 걸렸습니다.

영화 전문 매체 로저 이버트 닷컴의 평론에 따르면, 이 영화는 "성적 각성을 단순한 도발이 아닌 인식론적 여정으로 다룬다"라고 평가합니다(출처: RogerEbert.com). 욕망을 안다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과 연결된다는 해석입니다. 저는 그 말에 동의합니다. 다만 현실은 훨씬 더 길고 느리고, 버스 새벽 노선만큼 고요합니다.

구조 안에 갇힌 자유의 역설

벨라는 끝내 자신만의 삶을 구축합니다. 의대를 다니고, 고드윈의 저택으로 돌아오고, 그녀를 억압하던 전 남편을 양 뇌를 이식해 순한 존재로 만들어버립니다. 유쾌하고 통쾌한 결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지점에서 솔직히 동의하기 어려웠습니다.

현실에서 구조(Structure)는 그렇게 쉽게 뒤집히지 않습니다. 여기서 구조란 개인의 행동을 제약하거나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제도적·관계적 틀 전체를 의미합니다. 버스를 몰며 만나는 새벽의 노인들, 복지 현장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훨씬 무겁고 느립니다. 그들의 자유는 유쾌한 엔딩으로 포장되지 않습니다.

란티모스는 내러티브 프레임(Narrative Frame), 즉 이야기가 전달되는 관점과 방식을 의도적으로 동화적으로 설정합니다. 여기서 내러티브 프레임이란 어떤 이야기를 누구의 시선으로,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느냐를 결정하는 서사적 구조를 의미합니다. 동화적 과장을 통해 현실의 억압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전략인데, 그 전략은 분명히 유효합니다. 그러나 낙관적 결말이 현실의 고통을 미화하는 장치로 작동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 하나는 오래 남습니다. "당신은 누가 설계한 삶을 살고 있는가." 예순을 넘긴 지금도 저는 이 질문 앞에 섭니다. 2023년 성령충만을 경험하고 2024년 세례를 받은 것도, 결국 누군가 만들어준 길이 아닌 제가 선택한 방향으로 돌아온 순간이었습니다. 갓윈이 설계한 벨라가 결국 갓윈을 넘어섰듯, 저도 회사와 사회가 그어놓은 선을 넘어서는 중입니다. 다만 훨씬 천천히.

영화 학술 저널 《Screen》은 란티모스 감독의 작품 세계를 "구조적 통제와 개인적 일탈의 긴장 관계를 탐구하는 작업"으로 분석합니다(출처: Screen Journal - Oxford Academic). 그 긴장이 바로 이 영화의 핵심이고, 또 제 삶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야간 운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새벽 도로는 조용합니다. 저는 그 고독이 싫지 않습니다. 벨라가 세상을 부딪히며 자신을 완성해갔듯, 저도 그 침묵 속에서 오늘의 저를 다듬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자아를 찾는 여정에 있는 모든 사람, 특히 한 번쯤 자신이 누군가의 설계 안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본 분이라면 꼭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이 오래 남습니다.

참고:
RogerEbert.com — Poor Things Review
Screen Journal — Oxford Academ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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